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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개경에는 술집이 아주 많았는데 낮에는 '청루', 밤에는 '홍등가'라 불렸다.








-> 중세 고려의 황도 개경은 인구가 50만에 육박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대도시 중 하나였는데, 개경 귀족들의 높은 소비력은 생산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상품의 질을 극도로 향상시켰다.









-> 또한 '태창'이라는 창고에는 곡물 300만 석을 항시 저장해 두었다고 하는데, 개경에는 태창 외에도 '좌창' '우창' '용문창' 등의 창고가 더 있었기 때문에 저소득층에 대한 복지 역시 등한시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반면> 검약을 미덕으로 여겼던 조선은 소비가 위축되고 그에따라 생산과 내수시장이 마비되었으며, 국가의 년 재정 수입은 고작 20만 석에 불과했기 때문에 조선의 백성들에게 가난은 숙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북한의 현실과 소름돋을 정도로 유사한 조선의 시스템



그래서, 대한민국의 바로 전 왕조가 조선이 아닌 고려였다면

다른 나라보다 먼저 상업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까?

대답은 YES다.









-> 조선에선 양반이 아니면 기와집에 살 수 없었지만 고려에서는 돈만 있으면 평민도 기와집을 살 수 있었다. 이는 고려사회가 자본주의 시스템을 어느정도 수용하고 있었다는 방증인데, 그 뿐만이 아니다







고액화폐를 대량으로 발행하여도 귀족들의 소비력이 지탱해 주었기 때문에 여기서 오는 주조차익으로 고려 정부는 막대한 재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 고려의 대표적인 고액화폐 은병화. 화폐 생산 비용보다 화폐 가치가 더 높았기 때문에 정부의 재정이득은 더욱 극대화 되었다.











-> 이와 같은 능동적 경제시스템의 유기적 선순환은 벽란도의 국제 무역항을 중심으로 하는 개방적 무역시스템의 시너지를 받아 전 세계에 코리아라는 국명을 떨치게 하였으며, 무려 60만의 병력을 보유하며 위세를 누리던 군사강국의 기반이 되었다.







<반면> 국제 무역학은커녕 고소득 소비계층의 부재로 고액화폐를 발행할 수 없었던 조선은 주조차익 역시 얻기 힘들었으며, 나라에 돈이 없으니 군사력은 논할 가치도 못 되었던 것이다.







고려의 상업혁명 VS 조선의 농업혁명

 


-> 위와 같은 경제 선순환과 무역의 개방에서 축적되는 자본을 바탕으로, 고려는 최전성기였던 11C 이후 다시 한번 상업혁명의 부흥기를 맞아 누구보다 빠르게 근대국가로 치고 나갔을 것이며





-> 비록 조선은 농업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후기에 들어서는 농업혁명을 이루기까지 하였으나, 그것은 당시 빠르게 변화하던 세계의 흐름과는 동떨어진, 고립의 성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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