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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 22일부터 24일까지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사창리 일대에서 중공군 60사단이 공격준비 사격도 없이 국군 6사단 2연대와 19연대에 돌격을 감행했다.

1시간만에 겁에질린 국군이 무질서하게 도주하고, 예비대로 있던 7연대 마저도 패주를 감행하면서, 변변찮은 전투도 없이 사단 자체가 와해됨.

중공군에게 막대한 물자를 노획하게 하는건 물론이고 한국군을 지원하던 포병을 비롯한 지원부대까지 피해를 입었으며, 한개사단의 실책으로 인해 구멍이 뚫린 전선 때문에 미 제 1군단과 9군단이 후퇴를 해야 했음.

다행이도 영국군 27여단이 3일동안 중공군의 공세를 가평에서 저지시킴으로써 중부전선 자체가 붕괴하지는 않았음.

하지만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고 난 뒤 계속해서 이어지는 한국군의 지리멸렬과 이후 이어지는 현리전투를 비롯한 한국군의 지속된 패주에 미군 사령관들은 한국군에 불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특히 사창리 전투가 있기 2달전 있었던 한국군 8사단이 괴멸된 횡성전투를 두고 한국전쟁의 영웅이자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리지웨이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에

'한국인의 유전자에는 중국인에 대한 경외감이 깃들어 있는게 아닌가 생각했다'라고 할 정도로 한국군 사단들은 중공군 앞에서 패주를 거듭했고 유엔군에게 불신감을 주었으며 실제로 중공군도 한국군을 먼저 공격하는등 만만하게 보았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전선 붕괴 위험의 책임을 떠안게 된 6사단은 그 어느때 보다 치욕을 맛보아야 했으며 미군들로 부터 '겁쟁이 블루스타'라는 모멸적인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6사단장 장도영 소장은 8군 사령관 벤플리트 대장에게 불려가 호된 질책을 받았으며 미 9군단장 호지 중장이 장도영소장과 면담후 모든 전투를 이길수는 없다 위로를 건네면서도,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내 질책하였다.

William M. Hoge (1894-1979)

장도영 장군에게,

이 서한은 귀하가 1951년 4월 25일 귀하의 사단의 상태와 현황을 보고한 서한에 대한 답장이오.

1951년 4월 22일 밤 귀하의 사단이 보인 행위에 대한 나의 실망은 글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요.
22일 저녁 제2연대와 제19연대의 패주와 와해는 납득할 수 없으며 모든 면에서 불명예 스러운 것이오.
내가 가진 정보에 의하면 적군은 귀하의 사단에 비해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에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제2연대와 제19연대는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않고 혼란에 빠져 도주했으며 무기와 장비를 적이 노획하도록 내버려 두었고 우리측의 지원부대들 까지 유린되게 했소.
이 때문에 지원부대들은 심각한 물자와 장비의 손실을 입어야 했소.

제7연대도 나을 것이 없소.
제7연대는 예비대로서 공격을 감행해 제2연대가 잃어버린 진지를 탈환하라는 지시를 받았소.
이 공격을 실시했다면 성공했을 것이 분명하고 다른 부대들의 와해를 막는 한편 진지를 되찾을 수 있었으리라 확신하오.
제7연대는 이 공격을 실시하지 않고 대신 후방으로 달아났고 연대의 일부 병력이 23일 오전 수마일 후방에서 재집결했을 뿐이오.

귀하의 사단으로 인해 양익의 아군 부대들은 적의 돌파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소.
적군이 초기의 성공을 확대했다면 엄청난 참사가 일어났을 것이오.
아군이 적의 돌파를 저지할 수 있었던 원인은 적군이 소수에 불과했고 한국군 6사단의 패배로 인한 이점을 활용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오.

본인의 판단으로는 귀하의 사단이 와해된 근본적인 원인이 모든 계급의 장교와 부사관들이 지휘력과 통제력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오.
하위 제대의 부사관과 장교들이 초기 단계에서 지휘책임을 고수했다면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오.
이러한 혼란은 매우 빨리 퍼지기 때문에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진정시켜하는 것이오.

상위 제대의 지휘관들은 전투 초기 단계에 해당 구역에 없었기 때문에 지휘관들이 개입하기도 전에 병사들의 패주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상위제대 지휘관들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오.
사단장과 사단 참모들, 연대장과 그 이하의 지휘관들은 부대의 훈련과 규율 유지에 책임을 지는 것이오.
과거에 이러한 조치들을 충분히 취했고 이러한 긴급 상황에서 공격적인 지휘력을 발휘할수 있었다면 이와 같은 패주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오.

본인이 제9군단의 지휘를 맡은 이래 4월 22일 까지 제6사단은 부여받은 임무를 모범적으로 수행해 왔소. 본인은 귀하와 귀하의 사단을 높게 평가했으며 한미양국의 고위층에게도 칭찬했소.
이러한 확신이 없어진 것이 정말 유감이오.
앞으로 이와 같은 불명예스러운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을 만큼 전장에서 활약을 해야만 나의 확신이 되살아 날 것이오.

본인은 귀하와 한국군 6사단의 전 장병이 사단의 재건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 제8군의 다른 부대들과 전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 기대할 것이오.


또한 8군 사령관 벤플리트 대장에게도 서한을 보냈다.

1951년 4월 22일의 적 공세 이전만 하더라도 한국군 제6사단은 부여받은 임무를 모범적으로 수행해 왔습니다.

현재까지의 정보로는 1951년 4월 22일 공세 당시 적군의 병력이나 장비는 한국군 6사단 보다 열세였습니다.
적의 공격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않아 제2연대와 제19연대는 와해되어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않은채 혼란에 빠져 패주했으며 무기와 장비를 내버려두고 도망치면서 우리측 지원부대들 마저 유린되게 했습니다.
예비대로 있던 제7연대는 명령대로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제7연대 또한 혼란에 빠져 후방으로 패주했습니다.
4월 23일 오전 한국군 제6사단장은 사단의 병력이 대략 3,000명 정도라고 파악했습니다.
(6사단 예하) 연대들이 패주, 와해된 것은 도데체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며 모든 측면에서 불명예스럽습니다. 4월 23일, 재편성된 사단의 잔여 병력은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고 다시 방어진지를 버렸으며 지원부대들을 뒤로 하고 후방으로 도망쳤습니다.
한국군 6사단을 와해시킨 공격은 군단의 예비대로 있던 영연방 제27여단 소속의 약 2개 대대에 의해 저지되었습니다.

한국군 6사단에 소속된 분대에서 연대에 이르는 모든 부대들이 이렇다 할 저항도 없이 혼란에 빠져 와해된 상태로 퇴각한 것이나 무기와 장비를 내팽개쳐 적이 노획하도록 한 사실은 모든 계급의 장교들과 부사관들의 지휘력과 부대 장악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의견 : 본인은 한국군 제6사단의 패주는 모든 계급의 장교와 부사관들이 공격적인 지휘력을 결여하고 있는데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며 하위 제대들이 초기 단계에서 지휘책임을 고수했다면 혼란이 시작되지 않았을 것 입니다.
사단 내에 제5열이 침투해 있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소문을 퍼트리는 병사는 순식간에 공황과 혼란으로 번져나갈 수 있는 의심과 공포의 씨앗을 뿌릴 수 있습니다.

제안 : 모든 한국군 장교와 부사관들에게 지휘관은 책임을 가지며 이것은 부하들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고 책임이란 부하들의 훈련, 군기 유지, 그리고 복지라는 기초적인 원칙을 철저히 숙달시켜야 합니다.

 

 

이후 이러한 굴욕에 절치부심한 6사단은 결사의 의지로 용문산 전투에서 중공군을 파쇄하며

그간의 오욕을 깨끗히 씻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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