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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이싸빅 2021. 5. 7. 01:39

갈등을 사회조직의 기반으로 보는 마르크스의 시각은 체계화된 종교에 대한 비평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과거 인간은 자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신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충분히 발달한 과학 없이 인간이 파멸적인 환경변화를 설명할 길은 그 배후에 미스테리한 존재가 있다는 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떤 현상이나 힘을 의인화해서 표현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기도 하다. 

 


자연은 마냥 파괴적인 힘만은 아니었다. 고대인의 머릿속에서 신이나 요정과 같은 이름이 붙었던 초자연적인 존재들의 힘은 인간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그 중 고대에는 강을 다스리는 것 - 치수사업이 가장 중요했다. 농사를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치수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은 신과 소통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

 

인류의 초창기에 제사장 계급이 탄생한 것이다. 

제사장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계급이었다. 초자연적 존재들과 소통하거나 그의 뜻을 알아챔으로써, 혹은 그들을 대리함으로써 인간은 신들의 마음에 들고 싶어했다. 그러면 더 많은 복을, 농작물을, 사후 세계의 행복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인간의 모임으로써 만들어진 종교라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로 그 구성원이자 창조주인 인간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종교가 스스로 생명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구성원 개개인에 얽매이지 않았다. 제사장 계급마저도 종교집단의 부속품으로 전락했다.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할 수 없는 전통과 예식들이 생겨났다. 종교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종교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게 되었다. 

 

과거에 진노한 신을 달래기 위해 목숨을 바치던 사람들은 현실을 살아갈 많은 사람들을 위해, 그러니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해 흉년의 희생물이 되었다. 이제 종교는 그 절대적 교리를 구성원 모두가 목숨을 바쳐 지키는 것을 정의롭다고 말한다. 스스로가 초월적 존재가 된 종교를 위해 인간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시대가 왔다.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낸 종교가, 그 구성원의 총합보다 더한 권위와 생명을 얻어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과서에서 일반적인 역사발전과정으로 배웠을 역사발전 도식은 마르크스가 만들어낸 것이다.

 

아직 체계적 사회가 생겨나기 전 원시공산사회에서는 모두가 평등했다고 한다. 한국사에서는 고조선 이전의 이야기에서 나올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회조직을 이루고 살아가기 시작하며 배타적 소유권에 의해 계급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연하다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소유권으로 계급을 정의하는 다분히 마르크스적인 시각이다. 

 

소유권에 의해 계급이 분화되었다. 계급분화의 핵심이 재산이니,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종교 이야기로 잠깐 돌아가보자. 인간은 스스로를 위해 종교를 만들었으나, 종교는 초월적 존재가 되어 인간을 억압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위해 사회를 만들었으나, 인간사회는 초월적 존재가 되어 인간을 억압한다. 

 

그 원인은 사회구조의 태생부터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세계관에서 모든 것의 핵심은 생산수단의 소유자와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자의 갈등이며, 그 모순이 폭발하면 다음 단계의 세계관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것은 필연이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착각과 달리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각 단계의 사회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해도 모순이 본질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기 때문에 모두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자본주의 단계까지 필연적으로 진행된 이후, 공산사회로 나아갈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단계로의 도약을 방해하는 중요한 문제들이 있었다.

 


그것은 계급의식의 부재다.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몇가지만 짚어보자.

 

인간은 등따습고 배부르면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다. 아랍의 봄에서도 그렇고 '문제는 경제야!'는 여러번 증명된 이론이다. 마르크스는 안락한 봉건적 특권 없이 생존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경쟁하고 변화해야 하는 자본주의의 특성을 경계했다. 자본주의자들은 복지라는 거짓된 향락으로 노동자들을 이끌 것이다. 노동자들은 착취받는다는 개념을 체화하기보단 자본주의가 주는 빵과 포도주에 만족하고 평생 노예로 남게 될 것이다.

 

종교의 존재도 비슷한 맥락에서 '아편'이었다. 삶이 힘든 인간들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마음 속의 고통을 덜어낸다. 아편은 그 중에서도 현실을 잊는 가장 강력한 도구 중 하나다. 종교인 노동자들은 매 주말 교회에서 사후의 구원에 대한 약속, 착취자들에 대한 심판과 처벌, 참고 견디는 그들의 삶에 대한 칭찬등을 받으며 스스로가 처한 노예상태의 고통을 덜어낸다. 그렇게 그들은 주중에 일하고, 일요일에 아편을 빨았다.

 

국가의 존재도 비슷한 맥락에서 문제였다. 국민국가는 시민의 총합보다 더 위대한 것으로 취급받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영토, 국민, 주권의 존재가 잘쳐줘야 애매한 조직이었으나 한민족의 국가라는 추상적 개념을 대변했다고 해서 그 실체를 인정받는다. 이것은 종교와 비슷한 권능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이 상징물을 박살내고 찬양하는 노래를 훼손함으로써 제3자까지 불편하게 하는 것은 종교와 국가밖에 없다. 

 

그러나 국가는 왜 중요한가? 왜 중요해지는가?

 


사회주의적 가치관 속에서 갓 태어난 인간은 백지와 같다. 여기에 어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냐가 중요하다.

 

프랑스의 어린이와 영국의 어린이는, 기독교인 가족의 어린이와 이슬람 가족의 어린이처럼 본질적인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들의 정체성은 오로지 어른들의 교육을 통해서 형성되었을 뿐이다. 적절한 교육이 끝나고 국가에 소속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추상적인 것을 위해 인생을 희생하고(병역), 소득을 양도하고(납세),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전쟁). 

 

자본가들도 마찬가지다. 부르주아 계급으로 태어났거나 그 지위에 속했다고 갑자기 냉혈한이 되거나 무종교인이 되지 않는다. 착취자로 살고 싶은 자는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착취자로 살지 않으면 도태되게 만드는 체제다. 따라서 이 체제를 부수는 것은 모두의 이익이다. 

 

영국인 노동자가 총구를 돌려야 할 곳은, 같이 착취받는 프랑스인 노동자가 아니라 전 세계의 부르주아와 잘못된 사회 체제일진데, 국가의식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교육을 통해 국가관이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깨어있는 지식인들은 공장의 단순 노동자에게, 학교를 다니는 소년소녀들에게, 대학에서 진리를 찾고자 하는 청년들에게 가서 사회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다. 교육하고 재교육을 이어간다면 사람들은 마침내 계급의식을 각성할 것이다. 

 

현실 속에서 착취받는 노동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교육을 통해 형성된 대한민국 시민이라는 정체성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현실 속에서 착취받는 노동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교육을 통해 형성된 일본 시민이라는 정체성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좌파는 언제나 교화와 교육을 가장 중시해왔다. 페미니즘 교사 논란의 지령들을 보고 사람들이 맑시즘의 수법이라고 떠올린 이유 또한 그것일 것이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외치는 사람 중 99%는 읽어보지 않았겠지만 여성학의 성서 중 하나인 18세기 페미니즘 저작 <여성의 권리 옹호vindication of women's right>은 여성에게 교육과 기회를 베풂으로써 사회에 더 기여할 기회를 달라는 것이었다. 이 당시는, 당연히 사회상의 영향도 있겠지만,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되 각 성별의 효용을 최대한으로 늘려 전체 사회에 구성원의 일원으로써 기여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페미니즘은 이때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 같다. 요즘 페미니즘은 모계사회니 뭐니 하는 이야기도 잘 하지 않는다.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인간을 위해, 그러니까 남녀를 위해 만든 가부장적 체제가 스스로 생명을 얻어서 초월적 존재가 되어 남녀 모두를 억압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가 부르주아처럼 행동해야 했듯이, 남자는 남자답게 행동해야하는 맨박스에 갇혀있다. 여성은 노동자와 같이 착취받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모두 해방되기 위해서는 여성을 해방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가부장적 체제를 부수고 역사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가족주의라는 가부장적 제도가 해체될 때까지"

 

그들의 시선에 따르면, 수많은 여성들은 여성인권에 대한 여러 보조를, 자본주의 사회가 개돼지들에게 주는 복지처럼 떠먹는데, 그것을 먹고 안도하며 양성평등이 실현되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여성계급은 끊임없이 가부장적 사회의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누군지 끊임없이 되새겨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페미니스트들은 여성계급이 안도하지 않도록 끊임없는 교육을 통해 계급의식을 강화시키려 할 것이다.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는 지독할 정도로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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